2012년 01월 16일
오페라의 유령 (The Phantom of the Opera) 2004년 관람 이야기 1. Ramin Karimloo의 라울.
2004년에 다녀왔던 유럽여행에서 오페라의 유령을 관람했던 것은 내 덕질 역사에서 몇 안 되는 자랑거리 중 하나이다.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 경험을 어디다 제대로 글로 적어 놓은 적이 없었다. 이번 25주년 기념 공연에 대한 감상을 쓰려니 이 시절 이야기가 안 나올 수가 없는데, 따로 언급한 적이 없다 보니 한없이 길어지기도 하고. 그래서 아예 마음먹고 천천히 적어 보고자 한다.



이 이야기는 팬텀 오리지널 캐스팅 앨범(OLC)만 주구장창 돌려듣던 내가, 런던에서 JOJ+라민 버전을 대여섯 번 관람하면서 팬텀덕후+라이트뮤덕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이야기이다.
04년 이전의 나는 뮤덕이 아니었다. 02년에 팬텀 라이센스 공연을 본 적이 있었지만, 한 번 봤으니 그걸로 족한 상태였다. 여기(http://xuania.egloos.com/2453671)에도 썼듯이, 'CD와 비슷해서' 좋아하던 상태였으니 말 다했지. 런던에서 첫 티켓을 끊을 때만 해도 나는 '전에 본 공연이지만 영어판으로 한번 더' 보는, 말하자면 성지순례 혹은 유적답사에 나서는 기분으로 티케팅을 했었다. 맘마미아와 레미제라블 CD를 MP3로 변환해서 가져갔으니 뮤덕이 될 가능성이야 있었을지 몰라도, 봤던 걸 또 봐도 괜찮을라나 하는 마인드가 있었으니까 머글이었던 거다. 그러나 이 여행에서 나는 John Owen-Jones(JOJ)의 팬텀과 Ramin Karimloo의 라울을 만나게 되었다. 그리고 처음에 계획했던 유럽여행은 각 나라를 돌며 그 나라판 CD를 미친듯이 찾아 헤매거나 다른나라 버전 공연에 맞춰 여행일정을 재조립하는 팬텀덕질로 변했다;
사실 내가 뮤덕질하면서 공연장 회전문 돈 건 이 시기밖에 없다... 랄까, 이 시기에 25% 할인된 1층 앞줄이 한국돈 7~8만원 정도였는데 그 가격에 회전문 돌던 기억을 갖고 한국에서 10만원 훌쩍 넘는 티켓을 지를 수 있을 리가 없지;;; 그나마 그때 파운드가 미친듯이 비쌌던(1파운드=2200~2300원대) 때였고, 파운드만 사정없이 떨어진 지금 환율로 치면 차이는 더욱 벌어진다.
당시 나는 라민의 라울을 보기 위해 관람을 반복했고, JOJ의 팬텀을 두 번째 보고서 같은 공연을 회차나 배우 바꿔가며 보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. 이쪽 용어로 회전문을 돌게 한 것은 라민이고, 나를 뮤덕으로 만든 것은 JOJ라고 할 수 있겠다. 라민에 낚이지 않았으면 뮤덕도 안 됐을 테고 JOJ의 매력도 잘 몰랐을 테지만, 결국 후유증 오래 남는 건 JOJ더더라고.
두 사람의 캐릭터 특징을 설명하는 키워드는 대략 다음과 같다.
- 라민의 라울 : 미모, 젊음, 혈기, 사내놈, 도시남자(?), 기복;;;;;
- JOJ의 팬텀 : 미성, 마왕, 파워, 성깔, 격정, 버럭, 자존심, 철통성대; 안쓰러움, 귀족적
(주의사항 : JOJ 팬텀에 '귀족적' 과 '안쓰러움' 은 있으되 '신사적' 이나 '애처로움' 은 없다 ^^)
우선 라민의 라울부터. 내가 얘한테 낚인 건 일단은 이쁜 애가 노래도 잘 해서였다. 목소리야 나중에 팬텀 - 장발장 루트를 탔다는 걸로 대충 설명이 가능하고, 미모를 설명하기 위한 사진은 다음과 같다.



(왼쪽이 앙졸라스, 오른쪽은 마리우스)
사진들은 둘 다 2004년 가을에 레미즈의 앙졸라스로 투입되면서 찍힌 사진이다. 03년 가을에 라울로 찍은 사진도 있는데 그쪽보다는 이 사진이 실물에 더 가깝게 나왔다. 라울 사진 찍을 때는 머리카락을 좀 곱슬거리게 세팅해 놓은 것이 꽤 느끼한 데다 사진발도 영 안 받아서 별로다. 런던에서 묵던 민박집에서 팬텀 프로그램으로 열심히 영업했었는데, '느끼해서' 종종 실패했었지;;
최근 웹을 다니다 보니 이번에 나온 팬텀 25주년이나, 혹은 한 해 일찍 레미제라블 25주년 콘서트 영상에서 라민의 외모에 넘어간 사람들이 꽤 있다는 걸 알게 됐다. 그런데 나는 그 영상들로는 도저히 만족 못 하겠는 게, 20대 시절의 파릇파릇한 라민을 무대에서 생으로 봤었으니까. 특히 레미즈 25주년에서 실망했다. 팬텀 2년 뛰는 동안 피부가 맛이 갔는지 확 늙어 있더라고.
낚인 이유는 간단하지만, 얘가 아직까지도 나한테 있어서 오래도록 베스트 라울일 수 있는 이유는 캐릭터 해석에 있다. 혈기 넘치는 사내놈이지만 내 여자에게만은 따뜻한 도시청년이 바로 라민의 라울이었던 것.
런던에서 첫회를 관람하던 시기, OLC를 듣고 또 들어 마이클 크로포드와 사라 브라이트만에 쩔어 있던 나였지만 스티브 바튼의 라울은 그냥 그랬었다. 너무 순둥이처럼 부드럽기만 한 데다, 크리스틴의 소꿉친구라기엔 너무 노티나는 듯한 목소리 때문이었다. 그러나 라민의 라울은 혈기왕성한 20대 청년 느낌이 제대로 났다. OLC의 라울이 애초에 별로였던 터라, 크리스틴과 동년배로 보이는 이 라울은 보자마자 단박에 마음에 들었다.
25주년판 해들리 프레이저의 라울보다 더 에너지 넘치고 피끓고 성질도 종종 부리는 젊은 라울이, 또 크리스틴과 1:1로 붙는 씬에서는 더없이 스윗하게 변신한다. All I Ask of You는 말할 것도 없고, 2막에서 제 애인을 미끼로 사용할 계획을 짜는 녀석이 막상 크리스틴한테 미끼 하자고; 조를 때는 그렇게 달달할 수가 없다. All I Ask of You를 부르면서도 제 성질 못 이겨 이 앙다물고(^^) 노래하던 해들리 라울과 달리 이건 그야말로 내 여자에게만은 따뜻한 도시남자가 아닌가!
라울 캐릭터가 피끓는 사내놈 + 크리스틴한테 간 쓸개 다 빼줄 것 같은 호구;의 두 측면을 다 갖기가 쉽지 않다. 엔간해서 둘 중 한 쪽이거나 이도저도 아니기 쉬운데, 그리 경력이 길지도 않던 배우가 그걸 해 냈다. 연기력을 타고나서 -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 다른 라울들은 다 연기가 꽝이었다는 얘긴데 그럴 리는 없지. 그보다는 당시 이미 유부남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- 는 씁쓸한 결론을 다른 날도 아니고 바로 첫날에 인터넷 서핑하다가 얻었다 orz 만 25살 주제에 벌써 유부남에다, 어쩌면 애까지 딸렸을지 모르겠다 싶은 멘트들이 홈페이지에 좀 있더라고. 하긴 엔간해서 총각이 저게 될 리가 없지. 저 이상적인 라울은 와이프의 튜닝이 빚어낸 결과임이 틀림없으렸다, 쳇.
여기까지 열심히 찬양을 해 댔지만, 사실 라민 본인에게는 크게 깔 거리가 하나 있다. 바로 노래에 기복이 심하다는 점. 컨디션이 나쁜 날에는 살짝살짝 원음보다 더 높은 소리로 음이탈을 하거나, 노래 가사 일부를 애드립 치듯이 대사처리해 버리곤 했던 것이다. 지쳐서 있는 기운 다 뽑아다 하다 보니 텐션이 올라가서 생기는 현상인 것 같다. 위에 따뜻한 도시남자 어쩌고 했지만, 이렇게 컨디션 나쁜 날에는 스윗라울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냥 사내놈만 남아서 All I ask of You를 부르는데 이마에 핏대 서고 아주 난리도 아니다(...암만 그래도 해들리 라울 만큼은 아니지만) 그리고 이렇게 노래 날려먹는 날이 은근히 많았다. 라민의 라울을 5회 보았는데, 그 중 세 번에서 크고 작게 All I ask of You를 말아먹었으니까.
이게 얼핏 들으면 굉장히 연기에 몰입하느라 흥분해서 그런 것 같이 들리기도 한다. 나도 처음에는 연기겠거니 했었는데, 점점 반복해서 보다 보니까 그런 게 아니었다. 당시 JOJ도 크리스틴으로 나오는 배우에 따라 텐션을 약간씩 조절하곤 했는데, 라민의 텐션은 상대역과 상관없이 오직 무대를 많이 달렸는지 아닌지에 따라 유지되느냐 올라가느냐가 갈렸다. 게다가 All I ask of You에서 흥분하며 핏대 세우던 라울이 막상 2막 Notes에서는 스윗해지고 앉았고; 그러는 걸 보고 있으면 아까 그 곡 망친 거 맞구나 하면서 쓴웃음이 절로 나오곤 했다.
그래도 목소리는 여타 배우들에 비해 월등히 좋은 편이었다. 상대가 JOJ라 다행이지, 다른 팬텀이었으면 얘가 제대로 하는 날에는 소리로 발렸을지도 모른다. 당시 공연을 보면서 이 단점만 고치면 나이 더 들어서 팬텀을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. 이 예상은 반만 맞았는데, 팬텀을 하긴 했으되 텐션 올라가다 못해 노래 날려먹는 버릇은 못 고쳤더라고. LND CD 듣고서 아 괜찮아졌네 했다가, 이번의 25주년 팬텀에서 뒤통수를 맞았다. 하긴 라이브면 몰라도 레코딩에다 망한 노래를 떡하니 실어 줄 리가 없지;;
한동안 유튜브를 거의 안 보고 살다가(봐도 JOJ만 팠었고) 간만에 라민 중심으로 유튜브를 좀 뒤져 보니 노래 침착하게 제대로 하느냐 아니냐는 여전히 반반인 듯하다. LND에서 다른 곡도 아니고 Till I Hear You Sing을 애드립처리하는 직캠도 있는 걸 보니. 그 노래 실제 공연에서는 1막 시작하면서 부른다던데 대역도 아니고 오리지널 캐스트 본인이 시작부터 그걸 그렇게 날리면 어쩌냐...
만약 이런 단점이 없었으면 얘가 내 본진이 되었겠냐 하고 묻는다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. 얘가 본진이 되기엔 JOJ의 팬텀이 상당히 많이 심히 무척 매우 너무너무 (그만) 강했으니까.
(밤이 늦었으니 JOJ에 대해서는 다음에. JOJ 썰 풀려고 서론격으로 쓰고 있었는데 길어졌다;;;)
# by | 2012/01/16 03:32 | 뮤지컬 이야기 | 트랙백 | 덧글(38)




